눈과 마음이 하나되다 - 장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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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손이 하나 되다: 석운 하태진의 예술세계
장준구
이천시립월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석운石暈 하태진河泰瑨은 20세기 수묵채색화의 전개와 변화를 선도해온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반세기 이상의 오랜 시간 동안 산수화山水畵에 매진해왔고 이를 통해 한국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0세기 들어 사회 전반에 서구西歐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많은 작가들이 현대화現代化를 구실로 전통적 정서, 주제, 기법을 버리고 서구 회화에 경도되었던 것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현대화를 외면하고 수구적 태도를 취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전통에 단단한 뿌리를 두면서 현대성現代性도 잃지 않은, 일종의 신구조화新舊造化를 추구했고 결국 그 목표를 달성했다. 이 글에서는 이번 이천시립월전미술관 회고전의 출품작을 중심으로 하태진 작품세계의 흐름과 특징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하태진이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입학한 1958년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는 그의 전체 화력畵歷에 있어서 초기이자 모색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의 본령인 산수화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9년 작 <야경夜景>(도1)은 젊은 하태진의 야심찬 작품이었다. 어둠을 암시하는 시커먼 먹과 채색의 퍼짐과 번짐, 빌딩을 연상시키는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불규칙한 선들이 강한 화면을 선사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어두운 밤의 경치를 표현주의적 시각과 방법으로 그린 것이다. 하태진 역시 초기에는 당시 몰아닥치던 추상미술의 조류를 일정 부분 수용하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곧 추상화抽象畵 제작에 공허함과 한계를 느꼈고, 전통시대 동아시아 예술의 주류이자 근간이었던 산수화로 전향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가꾸어 갔다. 1969년 작 <산사山寺>(도2)는 당시의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넓은 여백에 빠르고 율동적인 붓질로 그려낸 산, 나무, 사찰의 모습에서 일신一新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반半 추상화된 산의 형태와 강렬한 표현성 등에서 <야경>과 같은 초기 작품의 경향이 일정 부분 이어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 그가 그렸던 산수는 실제 경치가 아닌 관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태진이 이후 작품세계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실경산수화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의 일이었다. 그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자연의 진의眞意를 모른 채 머리로만 뚫고 나가려니 한계를 느끼게 되더군요. 그래서 원原 바탕인 자연을 직접 대하며 스케치에 치중한 실경 위주의 작업을 하게 되었지요.”
관념적 방법의 산수화 창작에 한계를 느끼고 자연을 창작의 원천으로 인식한 것이 변화의 중요한 동인動因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그려진 그의 작품들을 보면 이전과 다른 충만한 현실감을 느낄 수 있다. 설악산, 북한산, 도봉산 등 실제 경치가 그 제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장르로서의 산수화는 워낙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보니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화풍상 정형화定型化가 두드러진 편이며, 이 때문에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 유사한 양상을 띠는 사례도 흔히 발견된다. 사실 이는 20세기 산수화에 있어서도 통용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실경實景의 사생寫生을 통한 산수화 창작은 이러한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직접적인 해법이 되었다.
1983년 작 <천불동 계곡>(도3)은 1970년대 이후 하태진 실경산수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50-60년대에 비해 훨씬 차분한 필묵법을 통해 천불동의 광활한 경치를 편안한 시각으로 담아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 산수화의 주된 조형요소인 필선의 흔적과 먹의 번짐 등이 중시되었음에도 화면 가득 현실감이 느껴지는 데, 이는 바로 사생寫生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하태진 스스로 개발한 침출법浸出法의 적용은 새로운 조형성 확보에 있어서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침출법이란 그림을 그릴 때, 그려지는 종이 위에 먹을 일정 부분 칠한 뒤, 그 부분이 마르기 전에 별도의 종이를 짧은 순간 접촉시켰다가 분리시킴으로써 먹이 불균일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퍼지거나 찍히는 효과를 의도한 기법이다. 이를 통해 하태진은 새로운 질감과 강한 표현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태진에게 있어서 1970년대와 1980년대가 적극적으로 실경산수화를 개척한 시기였음에도 그 지향은 이미 사실성 자체의 추구에 있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경에서 느껴지는 자연의 본질과 이에 반응하는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실제로 유사한 시기의 작품인 1988년 작 <폭포>(도4)의 경우 필묵의 강한 표현성과 여백의 대비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실경에 근거한 작품임에도 시각적 사실성보다 자연 자체의 내재적 본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는 하태진이 이러한 경향을 한층 본격화한 시기였다. 여전히 실경이 그 제재이긴 하지만 작가 스스로의 조율을 통해 사의성寫意性의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2002년 작 <비금도>(도5)는 당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1990년경부터 즐겨 다루기 시작한 해경海景을 그린 것으로 수평 중심의 구도와 넓은 여백, 옅은 푸른색의 수면이 시각적 편안함을 선사한다. 그렇지만 화면 중단에 우뚝 솟은 먹빛의 산을 배치함으로써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에 강한 생기生氣를 담아낼 수 있었다. 붓이 지나간 흔적과 먹의 퍼짐이 단순히 그 자체로 보이기보다 마치 자연의 응축된 에너지를 가시화可視化한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직정적直情的인 표현세계를 넘어 나의 심성心性에 부딪쳐 온 감동을 데포르메이션(deformation)시켜 재구성한 작품에 주력하고 있습니다.”라는 하태진의 언급은 당시 작품세계의 목표를 시사해준다.
하태진이 사의적 산수화의 세계를 펼쳐가던 와중에도 <행주산성에서>(도6)와 같은 사생을 통한 스케치는 여전히 중요한 요소였다. 아래와 같은 하태진의 언급은 그에게 있어 스케치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준다.
“저는 스케치 중심이므로 스케치한 것이 부족할 때는 정말 답답합니다 …… 스케치와는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태진 작품의 사의성이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성에 근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작품의 재현성再現性이 감소했음에도 오히려 강한 실질감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게다가 하태진의 스케치는 그려지는 대상인 자연과 완성작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작가의 자연과의 조우遭遇 이후 첫 번째 결과물로서 산수의 전신傳神을 가장 많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의미 깊다. 스케치의 경우 완성작에 비해 시각적으로 덜 정련된 것이지만, 자연의 생기生氣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는 셈이다.
2010년 무렵부터 하태진의 작품세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2015년 작 <산>(도7)에서 볼 수 있듯이 최소한의 묘사만으로 자연의 세계를 그리게 된 것이다. 먹만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화면이지만 선의 비수肥瘠와 강약强弱, 먹의 농담과 번짐을 통해 산형山形의 핵심을 담아낸 점이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그 목적은 묘사에 있어서의 감필減筆이 아니라 자연의 실체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다루어온 자연에서 본질의 본질을 추출한 뒤 조형적으로 더 이상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화면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중국 고대의 역사서인 『남사南史』에 등장하는 예술론 가운데에 “심수상응心手相應”이라는 말이 있다.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마음과 손의 하나 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지적知的, 심적心的 수양과 함께 필력을 연마해 온 하태진은 이미 심수상응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그 본질만을 화폭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작품세계의 모색과 탐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의 예리한 심안心眼과 원숙한 필력이 앞으로 어떤 작품을 탄생시킬지 못내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