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진의 작품세계 논고 - 강민기
-
- 첨부파일 : 0_하태진의 작품세계 논고_강민기.hwp (116.0K) - 다운로드
본문
논고
墨香을 머금은 자연이 백리를 굽이 돌아: 石暈 河泰瑨의 작품세계
강민기
홍익대학교 초빙교수
Ⅰ. 들어가며
“먹빛으로 표현한 우리 산수”, “수묵에 담아낸 자연의 마음”, “수묵에 녹아든 우리의 자연”, “오묘한 파묵의 도道”(경향신문 2003년 4월 8일), “먹과 여백의 미美, 장엄한 자연세계”(국민일보) “향香 속 현실現實”1981. 9.25 매일경제)…… 석운石暈 하태진河泰瑨(1938-) 화백을 말하는 이 글귀들은 수묵과 자연으로 귀결되는 한결같은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정서이다. 하태진은 처음 대학에 입학하던 1958년부터 최근까지 쉼 없이 수묵 산수화를 탐구해 왔고, 이러한 그의 이력은 한국 현대화단의 격변기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이 2017년 기획전으로 마련한 하태진 전은 그간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의 제자들이었던 박노수(2011), 이열모(2012), 장운상(2013), 이규선(2014), 임송희(2014), 박세원(2016)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왔던 전시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학교가 아니라 홍익대학교 출신의 화가를 택한 첫 기획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하태진은 대학시절부터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천경자의 수업을 들었고 특히 청전의 수묵산수화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화가로 평가받는다.
하태진은 지금까지 총 7권의 화집을 출간했고, 이경성, 오광수, 박용숙, 한정희, 홍선표, 유재길, 신항섭 등 대표적인 평론가 및 미술사가의 작품론이 있는 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잘 정리되어 있다. 河泰瑨 素描選集Ⅰ(1989); 河泰瑨 素描選集Ⅱ(1992); 石暈 河泰瑨 畵文集Ⅰ(1995); 石暈 河泰瑨 畵集(1997); 石暈 河泰瑨 畵集(2002); 河泰瑨(2003); 河泰瑨(2010).
또한 그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동료, 후배, 제자들의 추억담도 여러 편이 있고 그가 직접 쓴 기고 글들도 있어 그의 작품세계, 인적 교유관계 등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보다 생생한 그의 작가적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는 2008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수행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의 하나로 이루어진 ‘20세기 한국에서 진행된 서화 전통의 변모와 현대화’에 관한 결과물이다(도1). 하태진의 구술채록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08년에 수행한 사업으로 당시 필자가 하태진 선생님을 맡은 연구원이었다. 2008년 8월 1일과 8월 8일에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결과물은 현재 국립예술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다.
Ⅱ. 東洋畫科生의 앵포르멜 시대
하태진은 1938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2학년 때 대전으로 이사해 고등학교까지 이곳에서 보냈다. 한국 전쟁중에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을 겪었지만 어머니와 조부모님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고 성장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방과후 미술반 활동을 하며 그림을 배웠지만 외아들이었던 그에게 그 시절 대개의 어른들이 그랬듯이 법대나 상대(경영대)에 가기를 원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고 방과후에는 석고상이 있던 이웃 여학교에서 실기를 공부했다. 고3때에는 이미 동양화를 전공할 것을 굳히고 이상범에게서 잠시 배운 적이 있었다는 집 근처 화가의 화실에서 1년간 과외로 동양화를 배워 1958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홍익대 동양화과는 회화과 안에 서양화과와 전공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1958년에 동양화 전공생이 갑자기 늘어나 하태진 외에 최재종崔在宗(1936-), 이용휘(李容徽, 1937-2016), 오태학吳泰鶴(1938-), 하선용河善容(1940-), 김영길金永吉(1940-) 등이 있었고, 여학생 4-5명을 합쳐 총12명이 입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도2). 회화과 총 인원이 20명이었기 때문에 드물게도 서양화과 보다 동양화과 전공생이 더 많았던 해였다.
이들 이전에는 홍익대 회화과가 생긴 이래 6년째에 처음으로 동양화 전공의 이희세李稀世(1932-2016)가 들어왔고, 그 다음에 이재호李在鎬(1928-), 나부영羅富榮(1930-), 문은희文銀姬(1931-), 조평휘趙平彙(1932-), 이건걸李建傑( 1933-?), 유지원柳智元(1935-), 김동수金東洙(19352011)가 차례로 들어왔을 정도로 학생이 적었다. 하태진 동기생들의 대거 입학은 홍익대 동양화과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일어난 동양화 붐의 신진화가들이 이들이었고 특히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수묵산수화를 개척한 주역들이 많았다. 하태진은 한국현대 동양화단에서 굵직한 역할을 했던 이른바 ‘1938년생 화가’의 한 사람이다. 하태진, 이종상, 오태학, 송수남, 오광수, 송수남, 이규선 등이 그들이다.
당시 홍익대 동양화과는 1학년에 서양화과 교수의 데생, 2학년 때는 천경자千鏡子( 1924-2015), 3학년에는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그리고 4학년에는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의 실기 수업이 있었다. 당대 화단의 거목들이 포진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외에도 홍익대에는 박생광朴生光(1904-1985), 김옥진金玉振(1927-2017)이 시간강의를 맡았고 이경성李慶成(1919-2009)은 한국미술사와 공예론, 최순우崔淳雨(1916-1984)의 수업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평생 사용하고 있는 ‘석운石暈’이라는 호는 대학 3, 4학년 즈음에 선배였던 대산對山 김동수와 함께 ‘돌무리’, ‘돌이 많은 속에서도 필요한 돌은 꼭 있다.’는 의미로 지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구술한 바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8년도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157 20세기 한국 서화전통의 변모와 현대화Ⅰ: 하태진(채록연구, 강민기), pp. 141-142.
1960년 무렵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학시절의 대부분 작품들은 ‘태진泰瑨’이라 쓴 주문방인만을 사용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간혹 석운이라는 호를 더한 경우도 있다.
1. 앵포르멜의 ‘열병’
하태진의 대학시절은 일반적으로 한국현대미술사의 기점이라고 하는 1957년을 막 지난 1958년부터 1964년까지였다. 전후 추상미술운동이 전개되었고 ‘열병’ 같았다고도 하는 앵포르멜 시대로 들어선 때였다. 대학시절에 그린 <청계천> 시리즈나 <야경> 시리즈(1959-1960)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나는 <무제>, <기호1>은 이런 수업기의 고심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이다(도3).
천경자, 김기창, 이상범 선생의 수업을 수강하던 시기였지만 이미 추상화 또는 비정형화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붓을 거침없이 휘두르고, 흘리고, 번지는 먹의 운용, 무언가의 매재를 이용해 종이에 먹을 짓이기거나 탁본 같은 느낌의 표면은 앵포르멜 화가들의 즉흥성과 격렬함을 표현한 듯하다. 넓은 공간에 화선지를 두겹씩 80장을 붙여 놓고 밟고 다니면서 뿌리고 막 번지게 하는 작업들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0대 초에 전쟁을 겪었지만 앵포르멜이 지닌 액티브한 격정은 20대 초의 젊은이를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이런 작품들을 주로 정규 수업시간이 아닌 한밤중에 몰래 그려보았다고 회고했다. 안팎으로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청년작가의 의욕은 대학 내에 이루어지는 아카데믹한 교육에 만족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천경자의 수업 때에는 정물을 채색하는 기법을 주로 많이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어렵게 수입해야만 쓸 수 있었던 고가의 채색물감과 복잡한 제작과정을 거쳐야 하는 채색화는 학생들에게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다. 더욱이 물감 때문에 다른 수업처럼 50호 이상 100호짜리 화판을 사용할 수 없어 20호 정도에 그렸기 때문에 참외, 복숭아 같은 소품을 정물대 위에 올려놓고 스케치를 해서 마치 ‘수본繡本’에 채색하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위의 책, pp. 38-41.
이러한 경험은 그가 평생 변치 않고 수묵화에 몰두할 수 있었던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늘 새로운 것만 그리라고 강조했던 김기창, 기초를 튼튼히 하라는 것을 신념처럼 각인시켜준 이상범의 수업은 하태진의 평생 작업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앵포르멜을 추구하는 현대미술가협회(1956-1961) 화가들과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의 묵림회墨林會(1960-1964) 화가들은 기존화단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실험적 모색을 추구한 전위적 그룹활동을 벌이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묵림회(墨林會)는 1960년 3월에 서울대 미대 출신의 동양화가들이 수묵담채 계통의 새로운 현대화를 모색 추구한다는 이념으로 결성한 단체. 1964년까지 총 8회의 전람회를 개최했다. 창립회원은 박세원, 서세옥, 안혜택, 권영우, 장운상, 박노수, 안상철, 전영화, 민경갑, 정탁영 등이었다. 1964년 최종회에는 강영봉, 강영수, 김경자, 김상순, 민경갑, 박영주, 송영방, 서세옥, 신영상, 심재영, 안동숙, 이덕인, 이태식, 정탁영 등이었다. 회원 중 일부는 한국화회(韓國畵會)를 결성했다.
앵포르멜 미술로부터 일어난 화단의 변화는 대학생이었던 하태진에게도 위기감을 느끼게 했던 듯하다. 서울대에 비해 선배가 별로 없었던 홍익대로서는 58학번 동기(하태진, 오태학, 이용휘, 최재종)가 중심이 되고 선배 조평휘, 김동수를 포함시켜 6인의 창립멤버로 1963년 신수회新樹會를 결성하고 첫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신수회는 “재래의 동양화단에 나무를 심자”는 의미를 담고, “옛 전통에 기반을 두고 보다 현대적이고 새로운 감각의 동양화 추구”를 위해 모였다(도4). 홍대학보, 1970년 10월 15일. 신수회 9회전 관련. 1970년 당시에 신수회 멤버는 나부영, 박원서, 유지원, 송형근, 홍지순, 이석구, 홍병학, 이경수, 홍석창, 오낭자, 김영휘, 이영수, 변상봉, 홍용선, 김준자였다.
이 젊은 동양화가들의 전시를 미술기자 이구열은 “한국의 젊은 동양화가 가는 탁음濁音 소리가 있다. …… 하태진 씨는 기술적으로 화선지를 적시며 묵색을 자연적인 효과에 맡긴다. 그리고 복잡한 이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노력한다”고 평했다. 경향신문, 1963년 11월 20일. 하태진은 이 때 <幻覺>, <谷>, <응>, <岩의 話> 4작품을 출품했다.
“갈팡질팡의 혼란 속에 끼는 기분”, “과도기의 작의作意”(오광수) 등으로 평가받았던 이 시기의 신수회 동인전은 늘 동양화의 현대화라는 시대적 이념을 안고 기법적 실험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후에 멤버들의 학부 교수이기도 했던 이경성은 신수회 전을 보고 쓴 평에서 현대 동양화가 무너진 정신내용을 되찾고 타락한 기술전통의 재정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대학보, 1970년 5월 20일-25일.
이 신수회는 몇 차례 회원들의 탈퇴가 있었지만 점차 홍익대 동양화과 동문들의 단체로 그 위상이 점차 높아졌고 장수한 미술단체의 하나로 인정받았다. 신수회는 1985년에 新樹會-20年史 資料集(韓國新樹會史編纂委員會, 1985)를 발간했다.
3회전(1965년)에는 김철성金徹性, 이경수李炅洙, 유지원, 박원서朴元緖가 신입회원으로 들어왔지만 이 일로 인해 하태진은 결국 탈퇴하고 4회전부터는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3년간의 신수회 활동은 새로운 것을 그려야 하는 시대적 과제와 추상미술 작업을 시도하던 대학 졸업(1964) 전후기였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누구나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만큼 당시 국전의 아성은 압도적이었으나 이 역시 1963년에 한번 출품하여 입선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1963년 제8회 국전 동양화부에 <청계천>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공정하지 못한 심사제도에 대한 반감이 컸던 듯하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단호했고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되돌아 간 적이 없었다. 1964년에 백양회白陽會 공모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하는 등 일시적으로 공모전에 도전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룹을 벗어나 순수하게 자기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신진화가가 발표할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끊임없는 창작에 대한 열의와 성실함으로 오히려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홀로 새로운 기법적 모색에 열중하며 부부전과 개인전을 통해 작가적 입지를 서서히 굳혀 나갔으며, 머지않아 70년대에 일어나는 미술시장의 붐을 타고 주목받는 신예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 수묵의 회귀와 침출법의 고안
1965년에 하태진은 대학 3년 후배인 부인 강재순(姜在順)과 함께 처음 부부전을 열기 시작하여 1973년까지 꾸준히 부부전을 열었다. 제2회전은 1967년 3월에 열렸는데, <河泰瑨 姜在順 繪畵展>은 ‘다정한 신춘부부’로 소개되었다.
국전과 그룹전 그리고 70년대 성행한 여러 공모전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한영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며 작업을 했던 1974년까지 고독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거칠 수 있었다.
<야경>(1960)과 <야시장>(1965)은 삭막한 도시의 우울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작가는 주제의 감성적 측면보다는 기법적 실험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하다. <나무구성>(1964)이나 <숲>(1967) 같은 작품 역시 형상의 자연적 표현 보다는 먹의 변화에 집중한 기법적 실험에 관심이 더 모아진 감이 있다(도5). 오광수는 이러한 작품들을 “설명을 억제한 커다란 묵선墨線으로 요약시킨 자연의 전개로 일관되었다.”고 표현했다. 오광수, 「石暈의 近作」, 石暈 河泰瑨 畵集(明立美術, 1997), pp. 279-280.
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하태진은 추상화 작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현실적 수묵산수화에서 실험적 기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추상적 표현이 사라지면서 발묵의 표현이 훨씬 과감해지고 이것이 자연의 형상과 일치되어 보다 세련된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끊임없는 사생을 통한 새로운 기법적 모색을 위해 그는 작품마다 지, 필, 묵의 변화를 실험했다. <추경秋景>에서 진한 발묵으로 처리된 산은 마치 하나의 큰 덩어리처럼 자리하고 그 사이에 마을과 바위, 나무, 계곡이 조심스럽게 비집고 나온다(도6).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선지를 비집고 스며 올라온 먹의 신비한 베임이 인공의 느낌없이 곳곳에 마법처럼 숨어있다. 하태진이 스스로 회화분야에서 처음으로 명명한 ‘침출법浸出法’이 사용된 것이다. 침출법은 금속가공이나 양조술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태진은 먹을 듬뿍 묻힌 화선지를 그리고자 하는 화선지 위에 눌러서 먹이 묻어 나오도록 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 기발한 기법이 만들어낸 효과는 수묵화가 가질 수 있는 단조로움 속에서 시선을 머물게 하는 재미를 준다. 침출법이 들어간 그의 그림을 보고 “이건 어떻게 한거지?”하고 궁금해 했다고 하는데 간단한 기법이지만 이는 하태진 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가는 시기에 끝없는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20세기 한국 서화전통의 변모와 현대화Ⅰ 하태진, pp. 52-54.
침출법은 1967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어떤 그림의 경우 1965년작에 침출법이 사용된 경우가 있는데 작품의 제작연대가 잘못 기재되어 있거나 서로 다른 연대가 쓰여 있는 경우도 있어 연대는 수정가능하다.
Ⅲ. 현대적 수묵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
하태진은 수묵에 관련한 글에서 이렇게 자기고백을 한 적이 있다.
신비스러운 작품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고 세련된 조형과 깊은 개성을 살려 평생 동안 고고하게 먹을 취해서 동양의 특유한 먹을 연구하고, 자신의 정신세계가 손끝에서 펼쳐나가 형상화될 때 거기에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수묵의 세계가 있다. 하태진, 「水墨畵의 멋과 철학」, 河泰瑨(明立美術, 2010), pp. 122-125.
1970년대부터 1985년경까지 하태진의 작업은 사생을 통한 본격적인 실경산수화로 변화하고 있다. 이전까지 그의 산수화는 기법적 모색을 위한 실험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와 오랫동안 실험해 왔던 발묵법이 거의 사라지고 사생적 필선과 현실경치가 주를 이루게 된다. <산사>, <산>, <산과 달> 같은 불특정한 자연을 소재로 그렸다면 이 시기에 들어와 덕소, 한계령, 북한산, 삼각산, 도봉산, 설악산, 소금강, 천불동, 백담사, 귀면암, 회암리, 양수리, 정선, 속초 같은 지명들이 작품 제목으로 흔히 등장한다. 서울과 근교, 강원도 풍경이 주요 사생처였음을 알 수 있다.
화폭은 가로가 180cm 이상인 횡폭의 화면에 대자연을 파노라마처럼 펼친 대관산수가 80년대에 자주 등장하며 300cm가 훨씬 넘는 장대한 실경 산수화도 자주 그렸다(도7).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하태진 양식의 호방한 수묵산수화풍을 만들어냈다. 60년대부터 고안한 하태진 특유의 침출법이 이 시기에도 곳곳에 나타나며 하태진 양식의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청전 이상범이 늘 강조했던 기본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사물을 직접 많이 보고 느끼는 훈련, 요점을 스케치해서 작품으로 옮기는 훈련을 반복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같은 시기에 홍익대 동문이었던 조평휘, 김동수, 이용휘, 최재종도 모두 실경산수로 돌아와 사생을 바탕으로 야외사생을 다니곤 했다.
1970년대는 경제부흥의 기운을 타고 미술시장이 활성화되어 오늘날까지도 상업화랑의 중심이 되고 있는 명동화랑(후에 폐업), 동산방화랑, 현대화랑, 선화랑이 개업을 해서 각각 중요한 기획전을 열었다. 서울 시내에 흩어져 있던 화랑들이 인사동 거리에 집결하게 되면서 고미술과 근현대미술을 종합한 오늘날의 거리가 형성된 셈이다. 원로, 중진, 신진 동양화가들의 기획전은 크게 인기를 얻었고 특히 수묵산수화는 화랑, 미술애호가, 수장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30대의 젊은 작가들이 인기작가로 자연스런 세대교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미술시장의 활성화에 힘입은 바가 컸다. 따라서 국전과 기타 몇몇 공모전에 의존해야 했던 화가들의 활동무대는 시공립 미술관이 개설되고 신문사, 대기업의 대규모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더욱 다양해졌다. 미술시장은 호황을 누렸을 뿐 아니라 미술품 수집이 투기의 대상으로 과열화 되는 현상도 일어나 일부 화가들의 작품값은 ‘부르는게 값’이 될 정도였다.
근현대 화단을 정리하는 대규모 기획전이 열렸던 것도 의미있다. 화필畵筆 60년을 이어온 원로화가의 만년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동양화 여섯 분 전람회>(세칭 6대가전: 김은호, 노수현, 박승무, 변관식, 이상범, 허백련)(1971)이 서울신문 창간20주년 기념으로 열렸다. 덕수궁으로 이관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1972년에 한국근대미술 60년을 정리하는 의욕적인 전람회를 개최했는데 전국의 많은 소장가들의 호응을 얻어 김응원金應元의 <석란도石蘭圖>(1902), 이종우의 <모 부인상>(1927), 이영일의 <시골소녀>(1929), 김인승의 <나부>(1936), 심형구의 <포오즈>(1939), 정찬영의 <공작>(1936), 윤효중의 <현명>(1942) 등을 이 때 발굴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 명화 근대 5백년전>(1972)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역화가 100인전>(1973), <한국현대동양화대전>(1976), <동양화실경산수화전>(1979), <한국현대미술-1950년대전>(1980)이 열려 근현대미술에 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깊이 있는 학술적 성과도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반구대 암각화, 무령왕릉,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유물, 천마총, 황남대총, 경주 계림로 황금보검 같은 기념비적인 고고학 발굴이 1970년대에 쏟아져 나오면서 폭발적인 국민적 관심을 모았고, 민족미술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동양화단의 융성은 이러한 시대분위기 속에서 무르익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분방한 수묵을 통한 실경산수화로의 회귀
하태진은 1965년부터 1974년까지 9년간 근무했던 한영중고등학교 미술교사직을 그만두고 1974년 9월부터 홍익대 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스승 이상범李象範(1897-1972)이 타계했고, 천경자도 그만둔 뒤여서 그는 조복순曺福淳(1921-1981) 그리고 장우성과 함께 동양화과의 실기지도를 했다. 조복순은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 출신으로 천경자와 비슷한 시기에 조선대학교 강사를 지냈으며 1970년부터 1981년까지 홍익대 교수를 지냈다. 청토회의 창립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장우성은 1961년 서울대학교를 그만둔 후 홍익대 출강을 의뢰받아 기한부 강의를 했다가 1963년에 미국으로 떠나 1966년 10월에 귀국했다. 이후 다시 홍익대에 출강하여 1968년 전임이 되었고 1971년에 사표를 냈다지만 사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다시 홍익대에 재직했다. 더욱이 1975년에도 그가 ‘홍익대 대우교수’라는 직함을 공식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우성의 홍익대 재직기간은 명확하지 않다. 장우성은 회고록 畫壇풍상七十年(미술문화, 2003)에서 1968년에 전임교수가 되었고, 1971년경에 학교를 그만두고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않았다. 또한 1974년에 홍익대를 퇴직한 후, 1975년 말에도 홍익대 대우교수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향신문, 1975년 12월 26일.
이 시기에 하태진은 비록 전업강사이긴 했지만 일주일에 시수가 16시간이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홍익대에서만 수업을 했다. 1980년에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가 되어 2003년 퇴임할 때까지 타고난 성실함으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고 화단에서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1973년까지 부부전을 연 후 1974년부터는 단독 개인전을 매해 거의 빼놓지 않고 열었다. <하태진 회화전>(신세계미술관, 1974.5.21.-26)을 시작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전시활동을 했다. 1974년 그의 아홉번째 개인전에 왔던 일본인 마츠모토 아키시게松本明重(1914-1990)가 전시중이던 작품 6점을 한꺼번에 사고 일본 교토에서의 초대전을 제안한 행운을 안았다. 마츠모토 아키시게는 극우파 우익활동가로 일본동지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석운 하태진 화문집(1995), p. 208 신문자료 참조; 전시할 작품 외에 추가로 3점을 더 가져갔는데, 이 3점 중에서 아키시게에게 1점, 하코네미술관에 1점, 아다미미술관(MOA미술관: 하코네미술관과 자매관)에 1점씩을 기증했다고 한다.
아키시게는 3달 뒤에 교토 구세회관救世會館에서 <하태진 묵화전墨畵展>(1974.8.30.-9.5)을 성사시켰다. 30점을 전시하고 추가로 가져간 3점은 기증을 하려고 했는데, 전시한 30점을 아키시게가 모두 사버려서 이 한 번의 일본전으로 하태진은 “2년 정도를 아무것도 안하고 그림만 열심히” 그려도 될 정도의 그림 값을 받았다고 한다. 20세기 한국 서화전통의 변모와 현대화Ⅰ 하태진, pp. 52-54
전통을 이으면서도 “한국화에서 벗어나 대담한 묵상墨象과 새로운 공간설정으로 북종화가 갖고 있는 높은 기상과 예술의지를 추구하고 있는” 하태진 양식이 수묵화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고도古都 교토에서 이룬 쾌거라 하겠다. 경향신문, 1974년 5월 21일.
1970년대에 주요 화랑이 기획한 전시 중 하태진이 참여한 것은 명동화랑의 30대 작가들 <회화 오늘의 한국전: 30대의 얼굴들>(1971.3.25.-4.10), 현대화랑(사간동 신축건물)의 <개관5주년 기념전>(1975.3.22.-30), 문헌화랑의 <부채전시>(1975.6.11.-21), 동산방 화랑의 <동양화 중견작가 21인전>(1976.3.17.-26), 현대화랑의 신춘 초대전(1977.3.15.-21)과 하태진 초대전(1977.11.15.-20)을 꼽을 수 있다. 1977년에 선화랑의 개관기념전으로 열린 <동양화가 3인 초대전: 대산 김동수, 남천 송수남, 석운 하태진>과 바로 이어 진화랑에서 열린 <동양화 4인 초대전: 이규선, 정탁영, 송영방, 임송희>(4.20-27)는 홍익대와 서울대의 양대 구도를 의식한 기획전이었다. 이러한 대형화랑의 기획전은 동양화 붐을 일으키며 김동수, 송계일, 송수남, 송영방, 이규선, 이열모, 이영찬, 이종상, 임송희, 하태진, 홍석창, 오태학 같은 30-40대 화가들을 비중 있는 중진으로 올려놓았다.
1970년대 초에서 80년대 전반기까지 하태진의 분방한 필묵은 보다 철저한 사생을 통해 현실경치를 정직하게 표현해 냈다. 그는 대개 부드러운 산세 보다는 날카로운 바위가 우뚝 솟은 다이나믹한 산세를 그리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그래서 강원도로 스케치 여행을 많이 다닌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시기에 하태진은 그의 평생의 작업에서 볼 때 가장 큰 화면의 산수화들을 그려냈는데 30-40대의 열정과 완숙한 경지에 이른 자신감에 기인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시기적으로 대규모 상업화랑과 시공립, 대기업 미술관의 등장으로 인한 전시공간의 여유와 경제적 호황으로 인한 기업의 미술품 구매가 늘어난 것과도 관계가 깊을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작인 <한계령>(1976)이나 80년대 작들인 <소금강>, <설악산>(1984), 그리고 1984년작 <귀면암>에서 모두 ‘유연하게 번지는 농묵으로 대상(자연)을 화가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들이는 기량은 남성미가 철철 넘치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도8). 「金榮泰, 河泰瑨 작품전」, 京鄕新聞 1977년 11월 19일.
군데군데 침출법의 묵법이 나오는 것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그의 산수는 이 시대에 그토록 유행했던 수묵산수화들과 달리 전통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결코 예스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미술기자 이용우가 1970년대를 “화가의 작업이 이 사회에서 대접받을 수 있는 일임을 최초로 확인시켜준” 시대로 기억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이용우, 「韓國畵 所在불명」, 東亞日報, 1983년 9월 1일.
확실히 서양화를 능가하는 동양화의 최성기였다. 하태진의 80년대 역작으로 설악산 천불동의 귀면암을 그린 연작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구 제일은행 본점에 소장된 대작 <귀면암>(1984, 366×97㎝)은 세로 길이가 366㎝나 되는 대형 화면에 그려졌는데 귀면암을 단독으로 부각시킨 그 장대한 스케일이 눈길을 끈다(도9). 하태진의 1984년 개인전 때 팜플렛에도 게재되었던 작품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구 제일은행 본점 벽면에 실제로 걸려 있었지만 전체공간 속에서 이 그림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아쉽다. 신항섭의 월간 빌딩문화 1992년 9월호에 실린 글 속의 사진으로 이 그림이 당시 벽면에 걸려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도10). 그는 귀면암의 장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실제 모습보다 더욱 뾰족하게 우뚝 속은 모습으로 그렸고, 하단부를 짙은 연운으로 그려 신비로운 영봉임을 강조했다. 화면 곳곳에는 침출법에 의해 바위의 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시문해서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기묘한 바위 형상에 대한 감탄과 함께 자연미가 주는 정서적인 안정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신항섭, 「설악산 가을정취 살린 수묵담채의 귀면암」, 월간 빌딩문화(1992. 9), pp. 38-41.
암산을 즐겨 그리는 하태진의 실경산수가 귀면암에서 집약되어 필력의 원숙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980년에 모교인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로 임용된 하태진은 1981년에 현대화랑 초대로 15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이 때 1980년과 81년에 제작한 <산사>, <소록도>, <한강하류>. <소금강>, <속초>, <설악산>, <덕소>, <행주산성> 등 대작 40여점을 전시했다(도11). 이 작품들은 사생에 바탕을 둔 정치하면서도 활달한 필치와 부드러운 발묵 처리, 그리고 부분부분 농묵이 강조된 화면 구성에 의해 장쾌하면서도 서정적인 실경산수화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시기적으로 80년대는 표화랑, 가나화랑, 학고재, 금호갤러리, 서울미술관, 호암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국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강구책으로 민간 언론사가 주최하는 대규모 공모전이 열리면서 미술계는 나름의 눈부신 성장을 했다. 늘어난 미술인구와 신인작가들의 도전이 눈에 띄었고 국제교류전이 활발하게 개최되어 다양하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양화단의 경우 70년대의 호황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1980년대에는 김기창, 이상범, 박래현, 박생광, 이응로의 회고전이나 유작전이 열렸고,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수묵화대전>(1981), 호암갤러리의 <한국화 100년전>(1986), <산수화 4대가전>(1989),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근대회화 100년전>(1987)이 열려 대표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자료의 구축이 진행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박래현, 김기창, 박승무, 이상범, 변관식, 안중식, 김은호, 노수현, 조석진, 박승무, 허백련의 화집이 발간되었던 점도 고무적이다.
하태진은 1984년에 홍익대 동양화과를 나온 이건걸, 조평휘, 이용휘, 송계일, 김정렬, 김철성, 홍용선, 이정신, 이행자, 정하경, 한진만 등과 함께 신묵회新墨會를 결성해서 창립전을 가졌다. 신묵회는 “오늘의 한국화단 속에서 올바른 이념을 찾고, 자연을 통해 배운 것을 새로운 현대감각과 개성적인 표현으로 한국화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뜻을 모은 것이다. 하태진, 「新墨會-수묵화의 새로운 회화양식을 지향」, 河泰瑨(明立美術, 2010), pp. 78-79; 홍익대 선배들인 이건걸, 이용휘, 조평휘, 김철성, 정하경 외에 임태규, 이정신, 이행자, 김광헌, 이선우, 왕열, 박순철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1986년 대만의 원묵회元墨會와 첫 교류전을 가졌다.
1986년에는 대만의 원묵회元墨會와 수묵연립전水墨聯立展을 열며 교류를 계속해 나가고 있으며 제자들이 계속해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Ⅳ. 墨香을 머금은 자연 百里
1980년대 중엽을 지나서 2000년대까지 하태진은 발묵과 파묵으로 실경을 융합시키며 마치 20대에 시도했던 수묵의 기법적 모색기로 돌아간 듯 다양한 필묵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묵이 완전히 자신과 혼연일체가 된 듯 발묵과 파묵의 드라마틱한 조화를 드러낸 점이 이전과 달라진 점이다. 소재상으로는 이전부터 그려왔던 강원도의 설악, 소금강, 계곡, 폭포를 그렸지만 농묵의 번짐과 담묵의 선염을 대비시키고, 공간의 여백이 많아지고 있다. 산의 장대함을 보여주기 보다 자유자재로 휘두른 필묵의 분방한 조화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도12).
하태진은 자신의 필묵에 대해 “피처럼 엉킨 농묵을 틀어 감히 그 듬직한 기상만이라도 겨냥해 보는 아니 세필로 가다듬어 볼 수 있다는 자부심. 굵고 묵직한 묵선墨線을 틀어 산악의 장엄을 표현하는데 계절이 나오고 산사山寺나 산봉우리 사이에 이루어지는 절벽을 표현할 때, 적묵積墨의 결정적인 붓끝으로 그어내리는 힘차고 딱딱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운 질감을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다는 날카로운 대립에서 심오한 아름다움, 미의 세계를 연출한다. 이러한 특성이 선적禪的인 수묵의 회화정신을 깊은 감동으로 이끌어내고, 또 원동력을 발생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태진, 「水墨畵의 멋과 철학」, pp. 122-125
또 “언제나 미완성이고, 해도해도 끝이 없는 매력 있는 수묵의 세계를 탐구하고 오늘도 승화된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나름대로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의 작품의 완성이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임을 말하고 있다. 위와 같음.
같은 시기에 하태진은 산세山勢의 웅혼雄渾함보다 물에 관심을 갖고 섬, 어촌, 강변으로 나아갔다. 서울, 근교, 강원도 설악 풍경을 그렸던 것과 달리 그의 사생여행은 산을 벗어나 덕소, 양수리, 팔당, 제부도, 영종도, 을왕리, 강화도, 굴업도, 안면도 같은 근교의 강과 서해 섬이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설악 풍경을 즐겨 그렸던 이전 시기와 달리 속초, 한려수도, 비금도, 관매도, 곰소, 남해, 거제도, 소록도, 울릉도, 흑산도, 완도, 백도, 우도, 양도, 제주 같은 동해, 남해, 서해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많이 그렸다(도13). 70년대에서 80년대 전반기까지 대화면의 장대하고 압도적인 자연경을 소재로 했던 실경산수화와는 달리 섬 풍경은 가로 100cm이하의 비교적 소폭 산수화로 제작되었다.
작가노트에 “몸에 밴 도시의 생활, 작업하다가 지루하면 화랑이나 골동품 가게를 한 바퀴 도는 틀에 박힌 생활, 아스팔트의 콜타르 냄새를 푸른 바다는 말끔히 씻어 준 채 그저 싱그러움만이 파도에 내 마음을 싣고 넓은 바다 위에 솟은 홍도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태백이 달을 따라 물속에 뛰어 들듯이 그 푸름이 틀에 박힌 생활이 어제 내게 있었느냐는 듯이 말끔히 씻어 준다.”고 쓰여 있다. 하태진, 「莊嚴한 波濤의 合唱엔 젊음이..... 나를 잊게 하는 바다」, 河泰瑨(明立美術, 2010), p. 82.
1984년경부터 1988년까지 실경보다는 농묵의 번짐 효과를 통해 수묵화로서의 맛을 살린 그림들을 그렸는데 이후 그는 다시 이색적으로 대화면의 계곡, 정 시리즈를 몇 년간 그리기도 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그린 정 시리즈는 하태진의 작품세계에서는 매우 독특한 소재, 기법, 구도를 보여준다(도14). 세로로 긴 화면은 길이가 200cm가 훨씬 넘는 것이 있으며 다른 것들도 180cm가 넘으며 바위와 물, 흑과 백의 대비가 확연히 드러난다.
1990년에는 중국 계림여행을 다녀왔고, 1990년 8월에는 계림, 북경을 거쳐, 백두산 여행을 다녀왔다. 한반도를 너머 그의 사생여행이 백두산과 중국으로까지 뻗어 그가 이미 산수화가의 이상적인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를 실천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태진의 최근작 산 시리즈는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도15).
꿈틀거리듯 산등성이에서 보여주는 파묵과 발묵의 응축된 덩어리는, 농익은 붓질로 찍고 휘두르고 멈추고 다시 돌아나가는 수묵의 필획을 만나 긴장감 넘치는 유기체를 만들어낸다. 이 <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겹쳐진 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산의 어딘가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인가 하면 쌓인 눈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해서, ‘산’이라는 실체의 영역 속에 가두어 보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제 하태진은 수묵의 완성을 넘어 완전히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것임을 <산>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묵향을 머금은 자연은 청계의 물을 따라 백리를 돌아 푸른 산 끝에 머무는 것일까.
Ⅴ. 나오며
석운 하태진은 처음 대학에 들어왔던 얼마간의 시간을 제외하면 평생에 걸쳐 수묵을 매재로 한 실경산수화의 맥을 이은 화가이다. 화업 60년을 되돌아본다면 기법적으로는 파묵의 도道, 주제상으로는 자연의 마음, 그리고 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마도 동양화의 현대적 모색을 통해 자신만의 이상적인 산수화를 완성하는 것이 아닐까 감히 말해본다. 그는 수묵산수화가를 대거 배출한 1930년대 출생한 화가들 중에서도 그 중심에 서있는 화가임에 틀림없다. 수묵이라는 것이 평생에 걸쳐 수행하고 또 수행해도 끝나지 않는 것인지 이 노화가의 수행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10년 전쯤에 처음 선생님을 만나 구술채록문을 작성하면서 이런 마지막 질문을 드렸다. “어떤 화가로 기억되고 싶으시냐고.”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작품이 말해주는 거니까. 언제 빛을 볼런지는 모르지마는 좋은 작품만 남겨서 후대, 장승업이나 뭐 예를 들어서 정선 같은 그런 작가로 남고 싶은 거죠.”하고 웃으셨다. 20세기 한국 서화전통의 변모와 현대화Ⅰ 하태진, p. 199.
또한 작가노트에서는 “나는 전통을 중요시 여긴다. 전통인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삶을 응집시킨 것이라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결코 정지된 전통이 아닌 현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전통의 맥을 이어주는 한 고리가 되는 것이 나의 숙원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다를 바 없어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신념으로 화판을 마주한다. 화업으로 일관해 온 지난 50년을 뒤돌아보면 현대 한국화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늘 생각하고 고민하며 전통과 현대화가라는 골 깊은 양면적 문제를 극복하고자 여러 각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한국성을 지닌 자연스러운 회화정신과 기법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점점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인간은 결국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속에서 가장 편안하고 예술도 그 범주를 이탈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태진, 「작가노트: 전통 위에 선 현대작가의 辨」, 河泰瑨(明立美術, 2010), p. 188.
석운 하태진의 작품세계를 정리하는 말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