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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수묵으로 전개되는 자연의 근원 - 신항섭

석운문화재단
2025-01-08 09:55 14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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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으로 전개되는 자연의 근원


신항섭

미술평론가


수묵산수화는 채색을 배제하고도 실제감, 즉 기운생동의 이미지를 끄집어내는데 묘미가 있다. 자연은 그 어떤 존재물일지라도 저마다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자연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할 경우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색채로도 결코 현실색을 그대로 복제해낼 수는 없다. 어느 면에서는 현실색에 가까이 접근해 갈수록 실제와는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조물로서의 색채가 지닌 한계성인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달았음인지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일체의 색채를 배제한 먹으로만 자연이 지닌 실제감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 같은 목표에 근접하는 표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수묵산수화가 그것이다.

수묵산수화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선이다. 선으로써 모든 형상을 표현하고 실제감을 구현한다. 물상의 본질, 즉 진실을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응축된 선묘로써 갈파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선묘는 양식적 규범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화가 개개인의 노력과 미적 감수성에 의해 새롭게 개발되고 또 완성될 뿐이다. 

석운 하태진도 수묵산수화로써 한 소임을 얻고자 필생을 바치고 있다. 그의 스승인 靑田이 그랬던 것처럼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개별적인 필법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고 있다. 그는 어쩌면 사군자로부터 시작되는 전통 수묵산수화의 맥을 잇는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관념산수였건 실경산수였건 간에 전래의 남화에 면면이 이어져온 정신성, 즉 수묵산수화의 사상과 철학을 체득한 세대인 것이다. 따라서 수묵산수화는 결국 정신적인 깊이로서 완성되는 것이고 보면, 급변하는 미술계의 흐름 속에서도 의연히 묵필을 곧추 세운고 있음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보이지 않고 그 존재감이 새롭게 인식되는 까닭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정신성을 하찮게 여기는 세태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의연한 자세는 후학을 지키는 師道로서의 책무라기보다는 작가적인 신념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고법과 법첩을 섭렵하였고, 또 스승으로부터는 직접적인 사사와 감화를 통해 일찍이 한 작가로서 독립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승의 필법을 따르지 않고 처음부터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신념으로 일관했다. 그는 일찌감치 수묵산수화의 궁극점인, 개별적인 필법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기에 관념산수화가 지닌 표현적인 한계성을 타팧기 위해 실경산수로 시선을 돌렸다. 직접 우리나라 산천을 주유하면서 거기에서 느끼는 감흥을 사실적인 형태미 속에 투사시키면서 필력을 쌓는데 주력한 것이다.

  특히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대상은 기암절벽이었다. 장엄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창조력을 되짚어감으로써 시각을 열고, 필력을 쌓으며 또한 새로운 필법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필법은 자연이 만들어낸다. 그 자연이 지닌 독특한 형태가 그에 알맞은 필법을 유도하는 것이다. 한국의 산천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형태미가 있다. 그 독특한 형태미를 살리자면 고법을 차용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새로운 필법에 대한 모색과 실험이 요구된다. 그는 그 같은 인식 하에 실경을 취재하고 화선지에 옮기면서 한 소식을 기다려온 것이다.

  광대무변한 자연을 조그만 화선지에 압축하고, 단순화하며, 함축적으로 재현해내면서도 생생한 자연의 기운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얼핏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단색 필선에 의한 묘사만으로 기운생동하는 자연의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사실은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선묘에 皴과 發墨과 染이라는 부수적인 기법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생동감을 표출시킨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선대의 수많은 수묵산수화의 걸작들이 실증하고 있듯이 화가의 개별적인 필법의 완성에 의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화가 자신의 부단한 필법의 연마와 사색, 그리고 미적 감수성에 의해 진실한 미의 세계는 무한히 열릴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새로운 미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체의 고전적인 필법을 버렸다. 다시 말하면 접근방식을 달리한 것이다. 그는 득의의 필선을 얻으려 하지 않고 곧 바로 형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선묘에 의한 형태적인 완성을 통해 생동감을 얻으려는 대신, 조형적인 완성을 향해 직도하려는 표현의지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의 형태를 얻었을 경우에 거기에는 필경 조형적인 완성 여부에 대한 검증이 따르게 마련이다. 선을 통한 형상이든 면을 통한 형상이든 그림은 결과적으로 조형적인 조화, 균제, 통일, 비례에 대입되는 것이다. 개별적인 형식이란 개별적인 이해 및 해석이 담긴 조형성을 의미한다. 그림이란 최종적으로 조형의 새로움 여부로 그 창의적인 가치를 논하게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최근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호방하고 대담한 필묵법은 곧바로 이 같은 조형성을 겨냥하고 있다. 세필로써 형태를 열어가는 가운데 조형의 완결점에 이르려는 방식을 지양하여, 그야말로 일필휘지에 모든 표현을 집약, 응축시킴으로써 궁극적인 지향점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의 사실적인 묘사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연을 조형의 원본으로 받아들이되, 그 자연의 조형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려는 태도는 진정한 창작과는 다른 차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연을 거시적으로 본다.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형성하고 있는 허다한 물상에 대해서는 애써 시선을 돌린다. 자연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조응함으로써 온갖 물상의 존재감은 단순명쾌한 필묵 속에 함축되는 것이다. 존재를 표현하지 않았다고 하여 물상의 존재감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대자연의 기운을 간단명료한 필묵 속에 집약해냄으로써 거기에 실재하는 모든 존재의 의미를 내포하려는 것은 아닐까.

자연의 기운은 단순히 흙과 바위로써만 생성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온갖 생명체 및 생명적인 요인들이 집합되고 화음을 이룸으로써 대자연으로서의 기운이 生氣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기운을 자연의 이미지를 빌어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하나의 현상이다. 비록 화선지라는 평면공간에서의 일에 지나지 않지만 자연 현상의 시각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의 그림 또한 그 자신의 미적감각 및 의식이 작용함으로써 성립되는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선염, 발묵, 파묵 등의 기법을 적절히 혼용하면서 빠르고 호쾌한 문필로 단숨에 상을 열어가는 그의 작화법은 확실히 전통의 굴레를 벗어난 새로운 조형적 사고의 소산이다. 

선염, 발묵, 파묵에 의해 펼쳐지는 평면적인 묵흔은 물상의 평면화 및 단순화와는 다른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응축, 함축, 집약의 미학을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그 자신의 조형어법인 것이다. 형상의 통일, 기법의 형식화를 위해 필요한 그 자신만의 조형적인 해석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그의 표현은 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다. 주저함이 없는 필치와 힘찬 필세에 의해 조형화되는 자연의 이미지에서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느낌은 그 자신의 미적 감흥을 솔직하게 표출시키는 데에 기인한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고자 한다. 무언가 많은 의미 내용을 담고자 일부러 꾸미려하는 의도가 없다. 그러기에 세부적인 묘사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호방한 운필의 勢에서 미적인 쾌감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리라. 무엇보다도 먹의 빛깔이 맑아 시각적인 호소력이 강하다. 적절한 농담의 조절로 먹이 지닌 다양한 빛깔의 묘미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먹빛의 순수성을 잘 살려내고 있다. 이제 그가 가야할 곳은 어딘가. 오늘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보다 세련되고 심화되는 세계를 지향할 것이다. 그리고 독자적인 해석에 의한 조형언어의 완성이라는 문제와 보다 강렬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부딪치리라 기대된다.

  

  출처: 『石暈 河泰瑨』(明立美術, 1997), pp. 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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